분류 전체보기7 달팽이의 속도라도 내 초등학교 5학년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격이 차갑다’라고 쓰여있다. 보통의 어린이라면 슬퍼했겠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남에게만 차가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냉정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자화상 그리기 수업에서 미술 선생님이 말했었다. 일반적인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미화해서 그리기 마련인데 너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고. 더 못나게 그리지도 더 잘나게 그리지도 않는다고. 나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내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어린이는 냉정한 청소년이 되었다가 신랄한 성인이 되었다. 주변의 평판은 좋지 못했지만 내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인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있단 말인가? MBTI의 시대가 도래하고 나는 INTJ라는 분류 값을 얻.. 2023. 8. 17. 악인묘사 나는 악으로부터 태어났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비 오는 날 사람들이 우는 모습이었다. 한 남자가 내 어깨를 잡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 사람은 내 아빠다. 빗소리 때문에 무어라고 지껄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들도 나를 떼어냄과 동시에 나에게서 멀어졌다. 한참을 비를 맞으며 서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안았다. 이 사람은 내 엄마다. 몸을 비틀어 그 사람에게서 벗어난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내가 내 여동생을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애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한 일이라곤 시끄러운 동생을 이불에 감싸둔 것뿐이다. 그리고 그때 그 여자도 함께 있었다. 우는 동생을 가만히 쳐다보던 여자는 내가 이불로 동생을 싸.. 2023. 8. 6. 새 게임 버튼을 누를 수 없다면 컴퓨터 카드놀이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번 판은 틀렸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실행취소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아, 이건 초반부터 망했구나.' 싶은 것이다. 원래 풀 수 있는 문제인데 삐끗해서 중간부터 망한 것이 아니라 초장부터 아예 감을 못 잡았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질 때 나는 과감하게 새 게임 버튼을 누른다. 게임 다시 시작 버튼은 별로 의미가 없다. 어차피 다시 해봐야 똑같은 부분에서 헤맬 것이 뻔하므로. 글을 쓸 때도 이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문제는 이번 게임은 새 게임을 누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번 판은 나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다. 나는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른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다. 쓴다. 더 쓴다. 소설은 점점 심오해지고 알 수 없는 방향으로 .. 2023. 7. 23. 연금술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취미는 독서 초등학생 때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갔다. 숫기가 없어 친구 사귀는 게 어려웠던 나는 한동안 외톨이였다. 도서관은커녕 학급문고도 없는 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방에 처박혀 집에 있는 위인전과 어린이용 만화 한국사를 읽는 일뿐. 그때부터 독서는 내 유일한 취미였다. 그런 내가 책과 소원해진 계기는 암울했던 취준시기를 겪은 이후였다. 취업 준비를 한답시고 도서관에 앉아 책이나 읽다가 동생에게 호되게 창피를 당한 후로 독서는 내 분수에 맞지 않은 유희 거리가 되어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긴긴밤 길었던 취준을 끝내고 나는 꽤 안정적인 곳에 취업했다. 한때 친척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안줏감이던 내가 드디어 그들의 불판에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들이 모두 좋다고 .. 2023. 7. 9. 이전 1 2 다음